태움은 명백한 폭력이다 그리고 폭력은 전염된다 (결말 포함)
영화는 '나이팅게일 선서문'으로 시작된다. 어느 마을에 '판토마 바이러스'라는 신종 바이러스가 퍼진다. 그 마을 병원에서 근무하는 3개월 차 간호사 '다솔'은 바빠진 업무와 그에 따라 점점 더 심해지는 태움을 견디지 못하고 사직서를 제출한다. 하지만 일손이 부족한 상황에 수간호사는 되려 다솔을 협박한다. 다른 곳으로 취업하지 못하게 막을 거라며. 게다가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병원 여기저기에 소문을 내며 다솔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판토마 바이러스가 점점 확산되어 병원의 상황이 여의치 않자, 수간호사는 이제 막 제 몫을 해내기 시작한 '다솔'에게 신입 '은비'의 교육을 맡긴다. 다솔은 자신이 겪었던 언어폭력과 괴롭힘 등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은비'를 살뜰히 챙긴다. 본인보다 나이가 많은 은비를 사석에서는 언니라고 부를 정도로 친하게 지내려 노력한다. 그런데 이와 별개로 은비는 직장 여기저기서 실수를 연발한다. 이를 본 선배들은 다솔에게 왜 은비를 따끔하게 혼내지 않냐며 다솔을 질책한다. 그럼에도 은비는 실수를 멈추지 않는다. 응급환자의 조치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 위급한 상황을 만들었고 결국 다솔은 폭발하고 만다. '절대 선배들처럼 하지 말아야지'라는 다짐이 무색할 만큼 그녀는 다른 선배들과 똑같이 , 아니 그보다 더 심하게 변해간다. 태움을 하지 않을 거라던 그녀는 누구보다 가혹한 태움을 일삼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태움의 강도가 점점 높아져 갈 때 은비는 참지 못하고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하게 되지만 돌아오는 건 더 가혹한 폭력이었다. 그렇게 은비는 폭력에 홀로 갇히게 된다. 마치 은비가 오기 전의 다솔처럼. 그리고 이어진 은비의 대형 실수에 다솔은 환자들과 동료들이 다 보는 곳에서 큰 소리로 욕을 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며칠 뒤 은비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수간호사의 말에 다솔은 은비의 집을 찾아간다. 다솔은 그곳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은비를 발견한다.
태움을 제대로 고찰한 독립영화
평점 6.93, 러닝타임 73분의 짧은 영화 <인플루엔자>는 지난해 전주 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서 상영된 황준하 감독의 데뷔작이다. 그는 대학교 워크숍에서 쓴 대본을 '태움'이라는 소재로 바꿔 장편으로 확장했다. 태움에 대한 현실적인 연출이 가능했던 배경에 대해서는 간호 관련 책을 다 빌려 용어를 공부하는 것부터 시작해 실제 태움을 겪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모두 만나 인터뷰를 하기도 했고, 익명 채팅이나 이메일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이 중에서는 녹취본이나 영상을 몰래 찍어 보내준 사람도 있었다고. 영화 속 '태움'문화에 대해 과장이 아닌 현실을 그대로 담고자 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영화에서 나오는 모든 장면은 인터뷰를 통해 직접 태움을 겪은 간호사들의 경험을 도대로 만들어졌고, 오히려 수위가 너무 센 이야기는 덜어낸 것이라고. 심지어 예상을 뛰어넘는 충격적인 얘기들로 감독은 악몽에도 시달렸다고 한다. 여러 문제로
'영화를 계속 제작해야 하나?'라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인터뷰를 했던 간호사가 '태움으로 인해 극단적인 생각도 했었다며 있는 그대로를 꼭 영화에서 보여줬으면 좋겠다.'라고 간곡히 부탁하여 더욱더 사실주의에 입각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현실적이다 vs 과하다
영화는 두 가지 평으로 명확히 갈린다. 이 영화가 상영되고 나온 말이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분노한다면, 이 영화가 과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당신이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은 의료계에서 벗어났지만, 실제 태움을 겪어 본 나는 많은 부분을 공감하면서 봤다. 영화에서 처럼 태움을 겪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신규한테 정말 잘해줘야지."라고. 하지만 그 말을 지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영화에서는 폭력은 전염병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끔찍이 여기는 폭력이, 태움이, 집단 괴롭힘이 왜 전염병이 되어 끊임없이 돌고도는 걸까? 많은 간호사들이 태움이 끊이지 않는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을 구조라고 생각한다. 터무니없이 부족한 인력, 모호한 업무 경계, 정확하지 않은 업무 매뉴얼, 물리적인 체력의 한계, 그리고 낮은 급여까지. 모든 것이 간호사의 번아웃을 부추긴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움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 '태움'이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라는 뜻이다. 결국 물리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폭력을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포장해 행하고 있는 것뿐이다. 다들 알고 있다. 당하는 사람도 가하는 사람도 본인이 하는 행위가 교육이자 가르침인지, 그저 괴롭힘이자 분풀이인지. 나는 이 영화에서 그 문제점은 굉장히 잘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쉬운 점도 분명하다. 위에서 언급했던 '구조의 문제'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위해 정당하게 싸우는 간호사의 모습은 전부 빠졌다는 점. 구조의 문제는 드러냈지만, 그로 인한 간호사의 태움 문제도 드러냈지만 결국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빈약했다. 결국 그래서일까? 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반감도 일으켰다. 간호사들 의료진들은 안다. 이 영화를 보면 그러니까 저런 시스템이 문제인데, 저런 시스템이 바뀌어야 하는데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은 전혀 다르다. 여자들만 있으니까 저렇지, 저게 군대야 뭐야 라는 전혀 의미 없는 곳에 포커스를 맞추게 된다. 그게 이 영화의 단점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현실적이고 불편한 부분은 전부 봤는데 그래서 뭘 어떤 방향으로 나갔으면 좋겠다는 건지, 그래서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뭔지.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진 것 같아서 여러모로 아쉽게 느껴졌다. 이런 사실주의에 입각한 영화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지만 방향을 잘 잡아서 다양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마지막으로 구조적인 문제를 떠나 그냥 그 사람의 인성문제가 태움 그 자체인 지극히 개인적인 괴롭힘도 굉장히 많다. 그런 사람들이 영화를 보면서 합리화를 하는 것이 아닌 꼭 자기반성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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